||||

제목 고속도로 졸음운전사고 작성일 24-03-24 13:22
성명 Sunny 회사명
전화번호 - - 휴대폰번호 - -
이메일 aaa@naver.com
주소 ()
홈페이지
답변방법

본문

사설바둑이 國樂 . 단 가( 短 歌) 23가지 해설과 註 ​​목차(目次)​1. 만고강산(萬古江山) 2.진국명산(鎭國名山). 3. 죽장망혜(竹杖芒鞋). 4. 불수빈 (不 須 嚬).5. 운담풍경(雲淡風輕) 6. 홍문연가(鴻門宴歌)7. 장부한(丈 夫 恨). 8. 역대가(歷 代 歌)9. 조어환주(釣魚換酒(1)) 10. 탐경가(探 景 歌)11.소상팔경(瀟湘八景) 12. 月 齡 歌(달거리)13. 광대가(廣 大 歌(1) ) 14. 짝타령(짝 打 令)15. 몽유가(夢遊歌) 16. 호남가(湖南歌(1))17. 편시춘(片時春) 18. 초한가(楚漢歌)19. 강상풍월(江上風月) 20.풍월강산(風月江山)21. 역려가(逆旅歌) 22. 사시풍경가(四時風景歌)23. 백수한(白首恨)​​1. 만고강산(萬古江山)​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三神山)이(1) 어디메뇨, 일봉래(一蓬萊) 이방장(二方丈)과 삼영주(三영洲) 이 아니냐 죽장(竹杖) 짚고 풍월(風月) 실어 봉래산(蓬萊山)을 구경갈제 경포(鏡浦)(2) 동령(東嶺)의 명월(明月) 을 구경하고 청간정(淸澗亭)(3) 낙산사(洛山寺)와(4) 총석정(叢石亭)을(5) 구경하고 단발령(斷髮令)을 얼른 넘어 봉래산을 올라서니 천봉만학(千峰萬壑) 부용(芙蓉)들은(6) 하날 위에 솟아 있고 백절폭포(百折瀑布) 급한 물은 은하수(銀河水)를 기울인 듯 선경(仙境)일시가 분명하구나. 때마침 모춘(暮春) 이라 붉은 꽃 푸른 잎과 나는 나비 우는 새는 춘광춘색(春光春色)을 자랑한다.봉래산 좋은 경치 지척에 던져 두고 못 본지가 몇날인가. 다행히 오늘날에 만고강산을 유람하여 이곳을 당도하니 옛일이 새로와라. 어화 세상 벗님네야 상전벽해(桑田碧海)(7) 웃들마소. 엽진화락(葉盡花落)(8) 없을손가. 서산에 걸린 해는 양류사(楊柳絲)로 잡아매고 동령에 걸린 달은 계수(桂樹)야 머물러라. 한없이 놀고가자.​【解 說】​만고강산을 유람하려고 나섰다가 삼신(三神)의 하나인 봉래산에 이르러 그 절승(絶勝)한 근경(近景)을 다시금 그려 보며 찬탄하는 내용의 노래이다. 그런데 보통 단가(短歌)하면, 으레 중국의 지명(地名)이나 인물 등이 나오는데, 이 노래만은 우리나라의 지명과 명승(名勝)을 엮었다.즉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에 드는 강릉(江陵)의 경포대(鏡浦臺),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간성(奸城)의 청간정(淸澗亭) 등을 엮은, 인생의 무상함을 읊은 노래이다. 장단은 12박인 중몰이다.​註​(1) 三神山 一蓬萊·二方丈·三層洲를 三神山이라고 하는데, 海中에 있는 상상의 仙山. 우리나라에서는 金剛山· 智異山·漢拏山등에 蓬萊·方丈·瀛洲라는 별명을 붙여 삼신산이라 일컬음. 「蓬萊 方丈 여洲 比三神 山者 諸仙人及 不死藥 在焉而 黃金 白銀 爲宮闕」(2) 鏡浦 江原道 江陵市에 있는 경포대. 關東八景의 하나.(3) 淸澗亭 江原道 杆城에 있는 亭子. 關東八景의 하나.(4) 洛山寺 襄陽面 十里에 있는 절 이름. 關東八景의 하나(5) 叢石亭 通川郡 庫底邑에 있는 海中의 亭子로 關東八景의 하나.(6) 芙蓉 芙蓉은 연꽃의 一名. 산봉우리의 모양이 연꽃 봉우리 같다는 비유(7) 桑田碧海 桑田이 변하여 碧海가 된다고 하는 뜻. 즉 세상일이 변화 무쌍함을 비유한말. ;「麻姑云 接待以來 己見東海 三爲桑田 向到蓬萊 水淸淺干往者會時略半也 豈將 復還爲陵陸乎」(8) 葉盡花落 꽃이 지고 잎이 다한다는 뜻. 즉 樂極生悲의 비유.​​2. 진국명산(鎭國名山)​진국명산(1)만장뵹(鎭國名山萬丈峰)이요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이라(2). 거벽(巨壁)은 흘립(屹立)하여 북주(北主)는 삼각(三角)이요, 기암(奇巖)은 두기(두起) 남안(南案) 잠두(蠶頭)로다(3). 좌룡낙산(左龍駱山) 우호인왕(右虎仁旺) 서색(瑞色)은 반공(蟠空) 응상궐(凝象闕)이요(4) 숙기(淑氣)는(5) 종영(種英)(6) 출인걸(出人傑)이라 미재(美哉)라.아동방(我東方) 산하지고(山河之固)여(7) 성대태평(聖代太平) 의관문물(衣冠文物) 만만세지금탕(萬萬世之金湯)이라(8). 연풍(年豊)코 국태민안(國泰民安)커늘 구추황국(九秋黃菊) 단풍시절(丹楓時節)에 인유이봉무(麟遊而鳳舞)커늘, 면악등림(緬岳登臨)(9) 취포 반환(醉飽盤桓)하오면서(10) 감격군은(感激君恩) 하오리라.남산송백(南山松柏)은 울울창창(鬱鬱蒼蒼) 한강 유수(漢江流水) 호호양양(浩浩洋洋) 우리의 임은 차산수류(此山水流) 같이 산붕수갈(山崩水渴)토록 천천만만세(千千萬萬歲)를 태평(泰平)으로만 누리소서. 우리도 일민(逸民)이되어 강구연월(姜衢烟月)에(11) 격양가(擊壤歌)를(12) 부르리라. 연광(年光)이 반이 넘거들랑은 부귀공명(富貴功名)을 세상사람에게 모두 전하고 가다가 아무데나 산 좋고 물 좋은 데 명당(明堂)을 가려서 오간팔작(五間八作)으로 황학루(黃鶴樓) 만큼(13) 집을 짖고 유정(有情)한 친구 벗님 좌우로 늘어앉아 서로 의논을 하올적에, 일모도궁(日暮途窮)하면(14) 납촉(蠟燭)을 돋워 켜고 남녀 풍류랑(風流郞)이 모두 다 늘어앉아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자. ​【解 說】​이 에 있는 것을 따다가 만든 노래로서,서울 경복궁(景福宮)의 대궐터를 찬양하고 산세(山勢)와 지령(地靈)이 좋아서 인걸(人傑)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일민(逸民)이 되어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것도 인군(仁君)의 은혜라고 했다. 역시 군조시대에 지어진 노래임을 가히 짐작할수 있다.이 노래 역시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한문(漢文) 문자가 너무 어려워서 글 모르는 사람이 부를 때에는 사설(辭說)이 틀기기 쉽다. 그런데 단가(短歌)는 중국 고대 인물들이나 경치를 쳐들어 나열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이것은 황학루(黃鶴樓) 하나를 들었을 뿐이다.이것도 역시 중몰이 장단이다.​註 ​(1) 鎭國名山 國都의 主山을 말함.(2) 靑天削出金芙蓉 蒼空에 깎아 세운 듯한 산봉우리를 金芙蓉에 비유한말. 李白 「盧山東南五老峰 靑天削出金芙蓉」(3) 南安蠶頭 蠶頭는 서울 南山이 누에 머리같이생겼다는 말. 즉 남쪽으로 南山을 대한다는 뜻.(4) 凝象闕 궁중의 대문. 혹은 象魏라고도 함. 象은 象法이니 즉 법률이며, 魏는 富이니 옛날 법률을 城門에 높이 게시함을 말함. 「雲凝象闕隱」(5) 淑氣 靈氣와 같음.(6) 鍾英 영특한 氣運이 뭉쳤다는 말.(7) 山河之固 山의 험준함과 河水의 浩활함이 나라의 견고한 방어가 된다는 뜻. 「差哉山河之固 比 魏國之寶也」(8) 金湯 金城湯池의 준말. 쇠 같은 城과 끓인 물과 같은 못. 즉 방어가 견고함을 말함. ;「有 石城十도 湯池百步」(9) 승岳 먼 산줄기를 말함(10) 盤桓 흔들흔들 머뭇머뭇. 즉 그 주변을 돌아다닌다는 뜻. 陶淵明 「撫孤松而 盤桓」(11) 康구烟月 康壤는 四通五達한 큰 길거리이너데 태평한 세월을 말하는 것으로, 태평한 시대의 평화로운 풍경.(12) 擊壤歌 擊壤은 上古때 민간에서 행하던 한가지. 擊壤歌는 풍년이 들어서 농부가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를 이르는말. 중국 唐堯때 늙은 농부가 태령한 세월을 즐거워하며 땅을 치면서 부른 노래하고 함. 그 내용은「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임.(13) 黃鶴樓 중국 湖北省 武昌縣에 있는 누각. 崔灝 時 「昔人己乘黃鶴去 比地空餘鶴鶴樓」(14) 日暮途窮 날은 저묵고 갈 길은 멀고 아득함.​​3. 죽장망혜(竹杖芒鞋)​죽장망혜(1) 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 강산 들어가니 폭포도 장히 좋다마는 여산(廬山)이(2) 여기로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은 옛말삼아 들었더니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河落九天)은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로다. 그물에 유두(流頭)하여 진금(塵襟)씻은 후로 석경(石經)의 좁은 길로 인도한 곳 내려가니 저익(沮溺)은(3) 밭을 갈고 사호 선생(四皓先生)(4) 바둑을 둔다. 기산(箕山)을 넘어들어 영수(潁水)로(5) 내려가니 허유(許由)는(6) 어찌하여 팔걷고 귀를 씻고, 소부(巢父)는(7) 무삼일로 소 고삐를 거사렸노. 창랑가(滄浪歌) 반기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엄릉탄(嚴陵灘)(9) 여울물에 고기 낚는 어옹(漁翁)들은 양(羊)의 갖옷을 떨뜨리고 벗을 줄을 모르는 구나.오호라 세인기군평(世人棄君平) 미재(美哉)라. 군평역기세(君平赤棄世)라(10) 황산곡(黃山谷)(11) 돌아드니 죽림칠현(竹林七賢)이(12) 모였구나. 영척(녕戚)은(13) 소를 타고 맹호연(孟浩然)(14) 나귀 타고 여동빈(呂洞賓)은(15) 사슴타고 두목지(杜牧之)를(16) 보이랴고 백낙천변(白樂天[川]邊)(17) 내려가니 장건(張騫)의(18) 승사(乘사)로다(19).맹동야(孟東野)(20) 넓은 들에 와룡강변(臥龍崗邊)(21) 내려가니 과연(果然) 선생(先生) 계시는데 학창의(鶴창衣)(22) 흑대(黑帶) 띠고 팔진도(八陣圖)(23) 축지법(縮地法)(24) 흉장만갑(胸藏萬甲)하여(25) 두고 초당에 앉아 조을며 대몽시(大夢詩)만(26) 읊는구나. 물외협경(物外狹逕) 다 버리고 탄탄대로(坦坦大路) 다시 찾아 문수(汶水)에 배를 타고 이천(伊川)으로(27) 흘러저어 명도(明道)에게(28) 길을 염계(염溪)로(29) 내려가서 회암(晦庵)에(30) 들어가니 성리대전(性理大全)(31) 가례책(家禮冊)을(32) 좌우에 벌여 놓고 사서삼경(四書三經)(33) 예기(禮記)(34) 춘추(春秋)(35) 집주(集注)를(36) 내계시니 호걸지풍(豪傑之風)이요 성현지학(聖賢之學)이로다.고래천지기천년(古來天地幾千年)이요 금성옥신(金聲玉振)(37) 여기로다. 강산풍경(江山風景) 매양(每樣)보니 풍월(風月)이나 하여보자. 음영완보석양천(吟영緩步夕陽天)에 촌려(村廬)로 돌아오니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명월(明月)은 만정(滿庭)이라 강산풍경 이러하니 금지할 이 뉘 있으리. 어화 벗님네야, 빈천(貧賤)을 한(恨)치 말고 자락(自樂)하며 지내 보세.​【解 說】​이 ;는 흔히 많이 불리는 단가(短歌)이다. 세상 영욕(榮辱) 다 버리고 간단한 몸 단장으로 강산풍경(江山風景)을 찾아 탐승(探勝)하는 것을 엮었다.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 시절에서부터 거슬러 내려와 면면 수천년에 달하는 인물들은 나열했는데, 제왕(帝王)·은사(隱士)·호걸(豪傑)·학자·문사(文士)·명장(名將) 들을 다채롭게 엮어 놓았다.​註​(1) 竹杖芒鞋 대지팡이와 짚신.(2) 盧山 중국 江西省 九江府에 있는 山이름.(3) 沮溺 長沮와 桀溺의 두 사람. 春秋時代 사람들로 孔子가 亂世에 벼슬을 산다고 비난하고 통탄하면서 밭이나 갈고 벼슬을 아니 한 隱者들.(4) 四皓 秦나라때 隱士. 漢高祖의 부인 呂后가 제일 공이 많은 韓信과 英布·彭越등에게 叛한다고 죄를 뒤집어씌워 죽였고 漢高祖의 後宮 夫人과 趙王 如意를 무참히 죽이는 등 자기 세력을 늘리기 위하여 혹독한 짖을 많이 하므로 이를 피해 商山에 隱居한 네 노인. 즉 東園公. 夏黃公. 綺里秀. 角里先生 네 老人이 南山에서 바둑이나 무고 閑日月 했는데, 鬚眉(수염과 눈썹)가 白色이므로 호라함.(5) 箕山 潁水 箕山과 항水는 河南省 登 縣에 있는 山과 강의 이름. 堯代에 巢父와 許由가 名利를 피하여 隱居 한 곳.(6) 許由 堯代의 高士. 堯가 천하를 禪讓하려 할 때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음. 「許由隱箕山 以手捧水飮之 人遺一 瓢 得比以取飮 飮訖於樹上 風吹歷歷作聲 尙以爲煩遂去之」(7) 巢父 堯代의 高士. 堯가 천하를 禪讓하려 할 때 이를 받지 않았음. 「巢父者 堯時 隱人也 山居不管世利 而樹爲巢 以寢其上 時人曰 巢父」(8) 滄浪歌 漁夫가 부르는 노래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영 滄浪之水濁兮 可以濁吾足」(9) 嚴陵灘 嚴子陵의 고기 낚던 여울 嚴陵瀨. 江省 桐盧縣 남쪽에 있음. 桐江七里灘이라고도 함. 嚴子陵의 이름은 光, 子陵은 字. 東漢餘조人. 幼時에 漢 光武皇帝와 同遊하고 光武 즉위후에 變姓名하여 은신하므로 帝가 物色으로 색출하여 諫議大夫를 除援하였으나 받지 않고 富春山에서 耕田하면서 은거하였음.(10) 君平 姓이 嚴이요, 이름은 遵, 君平은 字. 漢人으로 成都市에서 占筮를 잘해서 예언을 하면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으므로 君平이 또한 세상을 버리고 점을 치다가 90이 넘도록 살았다함. 점을 쳐서 1백 냥을 벌면 족하다 하며 가게문을 닫고, 그 돈이 다 떨어지며 다시 문을 열고 점을 쳤다함. 「有道人嘗見老수 同室 歲餘告曰 君乃漢嚴君平 取一書援之而去」(11) 黃山谷 이름은 庭堅, 字는 魯直, 號는 부翁 또는 山谷이라고도 함. 宋나라 哲宗 때 사람으로 詩에 특장이 있어 세상 사람이 蘇東坡의 다음 간다고 해서 蘇黃이라 하고 또한 草書와 해法에 유명함. 벼슬은 校書郞舍人을 歷任하고 知太平州를 하다가 宣 州로 귀양가서 죽었음 . 여기서도 사람의 이름을 地名에 비유해서 혼용하였음.(12) 竹林七賢 晋이 阮籍. 혜康, 山濤, 向秀,劉伶,王戎,阮咸 일곱 사람이 막역한 親友로서 항상 죽림에 놀았으므로 세상사람들 이 竹林七賢이라 한다. 그런데 이 일곱 사람은 蜀漢의 遺臣으로 晋나라 司馬炎을 섬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竹林에서 놀았으나 뒤에 무서운 박해와 살해를 당하고 오직 늘 취해 있던 劉伶만이 제 명에 죽었다.(13) 녕戚 周 나라 春秋때 齊 桓公의 賢臣. 徵賤時에 소를 타고 뿔을 두드리며 ;를 부르니 桓公이 듣고 隱者인 줄 알고 데려다가 大夫를 삼았음.(14) 孟浩然 唐 襄陽人. 젊을 때부터 節義에 대하여 꿋꿋한 志기가 있어 오랫동안 鹿門山에 은거하여 있다가 나이 40이넘은후에 처음으로 京師에 와서 大學館에서 詩를 지으니 滿座가 탄복하였다 함. 著書로는 4卷이 있음.(15) 呂洞賓 唐나라 사람으로 本名은 암. 終南山에서 修道한 八仙의 하나.(16) 杜牧之 姓은 杜, 이름은 牧, 字는 牧之. 벼슬이 中書舍人에 이름. 문장이 뛰어나고 얼굴이 冠玉같고 風采가 豪邁하므로 世人이 小杜라 일컬으며, 杜甫의 老杜와 비교하였음. 저서로는 ;이 있음.(17) 白樂天(川)邊 唐代의 대표적인 詩人. 772∼846. 姓은 白, 이름은 居易, 樂天은 字. 여기서도 白樂天을 川邊으로 고쳐 노래 부른 것이다. 이는 李白이 죽은지 10년, 杜甫가 간지 2년, 韓愈(退之)가 다섯 살 때인 772년에 洛陽동쪽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음. 號를 香山居士라 하고 비교적 순탄한 관리 생활을 하고, 刑部尙書로 은퇴함. 대중적 작품. ;이 있음.(18) 張騫 중국 전한때의 외교가. 西方 旅行家. 字는 子文. 漢中郡 成固사람. 武帝 때에 匈奴를 制하기 위하여 西方의 大月氏와의 同盟을 촉진하고자 西域으로 가다가 도중 匈奴에게 잡히어 1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나서, 大원·康居를 거쳐 목적지에 다다랐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년만에 돌아옴. 印度通路를 개척하고 東西의 교통과 문화 교류의 길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함.(19) 乘 떼를 탔단는 말. 즉 張騫의 八月차라고 하는 仙책를 말함.(20) 孟東野 唐 武原人. 이름은 郊, 자는 東野. 貞元中에 進士하고 벼슬은 漂陽尉이에 이르고 唐의 유명한 詩人으로 韓愈와 相善하였음.(21) 臥龍崗 襄陽縣 南陽에 있는 山 이름. 諸葛亮고이 微時에 은거하던곳.(22) 鶴창衣 鶴의 털로 만든 털옷. 빛이 희고 소배가 낣고 변두리를 黑色으로 꾸민 웃옷.(23) 八陣圖 행군하는 陣法. 太古風后의 八陣法은 「天·地·風·雲·龍·虎·鳥·蛇」 諸葛亮 八陣法의 陣形은「洞當 中黃 龍騰 鳥翔 連衡 미奇 虎翼 折추」 「기州奉節縣 本漢 魚腹縣 八陣圖 左縣西南七里 聚細石爲之 各高五尺 廣十圍 凡六十四聚 又陜西汚縣 定軍山下 赤有 八陣圖遺跡」(24) 縮地法 術家에서 땅을 주름잡는법. 즉 먼 것을 가까이 하는법. 「費長房 有神術 能縮地脈 千里在目前원然 放之 復舒如舊」(25) 胸藏萬甲 가슴 속에 만 가지 둔갑술을 지니고 있다는 말. 즉 遁甲藏身과 같다. 둔갑은 術數의 일종. 易緯乾盤에 起하여 太乙을 지나 九宮法을 행하는 것이며, 이것이 南北朝때에 성행하였다. 이 術이 처음 黃帝風后와 九天玄女에서 나왔다고함. 方術傳註 「推六甲之陰而隱遁」 藏身은 術로써 몸을 감추는 것.(26) 大夢詩 諸葛亮이 지은 詩. 「草堂春睡足 窓外日遲遲 大夢誰先覺 平生我自知」(27) 伊川 姓은 程, 이름은 이, 字는 正叔, 號는 윤川. 明道先生의 동생. 道學君子이므로 형제를 兩程이라 이름. 이것도 윤川을 강물로 혼용하였음.(28) 明道 姓은 程, 이름은 顥, 字는 伯淳, 號는 明道. 河南人. 宋 神宗 때 大賢人으로 벼슬이 宗正寺丞에 이르렀고 ;를지어 우주의 본성과 사람의 性이 꼭 같은 仁임을 주장하였음. 文廟配享됨.(29) 염溪 宋 道州人. 性은 周, 이름은 敦이, 茂叔은 字, 號는 염溪. 盧山 蓮花峰下에 살면서 ;을 지었음.(30) 晦庵 姓은 朱, 이름은 喜, 자는 元晦, 號는 晦庵. 南宋 大儒로서 그 학문은 居敬窮理를 위주로 하였고 외에 수십종의 저서가 있음.(31) 性理大全 周염溪通書 二程全書 초康節皇極經世 張橫渠正蒙 朱子啓蒙篇을 聚合한 것이며 明의 胡廣등이 奉勅하여 宋儒의 一百二十家를 뽑아서 十三目으로 나누었고 理氣說의 祖宗임.(32) 家禮 朱文公이 편찬한 冠·婚·喪·祭 四種의 禮書.(33) 四書三經 四書는 을 말함.(34) 禮記 漢儒 戴德이 214편의 번거롭고 중복된 것을 간추려 85편으로 합해 기록했으며 이것을 ;이다.(35) 春秋 孔子가 修正筆削한 魯史. 周平王부터 威烈王에 이르기 까지 242년간의 일을 기술한 역사책(36) 集註 古書의 문귀를 풀이하여 後人이 이해하기 쉽도록 한 것.(37) 金聲玉振 음률. 처음에 金聲을 내고 마지막에 玉聲으로 그치는 것을 말함. 즉 始終이란 뜻. 「金聲始條理也 玉振終條理也」​​4. 불수빈(不 須 嚬)​어화 청춘 소년니머네 장부가(丈夫歌)를 들어보소. 국내 청년 모아다가 교육계에 넣어 두고 각종 학문 교수(敎授)하여 인재 양성하는 것도 장부의 사업이요 천리준총(千里駿총)바삐 몰아 칠척 장검손에 들고 백만 대병 지휘하여 통일 천하하는 것도 장부의 사업이라.장부가로 노래하니 뜻이 깊고 애가 타서 가슴이 답답목마르다. 뒷동산 지는 꽃은 명년삼월 다시 피되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청춘 어려워라.개벽(開闢)후에 내린 사적(史蹟)역력히 들어보소.요순(堯舜)(1) 우탕(禹湯)(2) 문무(文武)(3) 주공(周公)(4) 공맹안증정주자(孔孟顔曾程朱子)는(5) 도덕이 관천(貫天)하사 만고 성현(萬古聖賢)일렀건만 미미한 인생들이 저 어이 알아보리. 강태공(姜太公)과(6) 황석공(黃石公)과(7) 사마양저(司馬穰菹)(8) 손빈(孫빈)(9) 오기(吳起)(10)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 는 만고 명장일렀건만 한번 죽음 못 면했네.멱라수(멱羅水)(11) 맑은 물은 굴삼려(屈三閭)의(12) 충혼이요 상강수(湘江水) 성긴 비는 오자서(伍子胥)의(14) 정령(精靈)이라.채미(採薇)하던 백이 숙제(伯夷叔薺)(15) 천추명절(千秋名節)일렀건만 수양산(首陽山)에 아사(餓死)하고,말 잘하는 소진(蘇秦)(16) 장의(張儀)(17) 열국제왕(列國諸王) 다 달래도 염라왕(閻羅王)은(18) 못 달래어 춘풍세우두견성(春風細雨杜鵑聲)에 슬픈 혼백되었도다.맹상군(孟嘗君)의 계명구폐(鷄鳴狗吠)(19), 신릉군(信陵君)의 절부구조(竊符救趙)(20) 만고호걸일렀건만 한산세우미초중(漢山細雨微草中)에 일부토(一부土)만 가련하다.통일천하 진시황(秦始皇)도(21) 아방궁(阿房宮)을(22) 높이 짖고 만리장성(萬里長城)(23) 쌓은후에 육국 제후(六國諸侯) 조공받고 삼천궁녀 시위할 제 동남동녀(童男童女)(24) 오백인을 삼신산(三神山)(25)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보낸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고, 사구평대(砂丘平臺)(26) 저문날에 여산(驪山)(27) 황초(荒草)뿐이로다.역발산(力拔山) 초패왕(楚覇王)도(28) 시불리혜추불서(時不利兮추不逝)라(29) 우미인(虞美人)의(30) 손목잡고 눈물뿌려 이별할 제 오강(烏江)(31) 풍랑(風浪) 중에 칠십삼전(七十三戰) 가소롭다.동남제풍(東南祭風)(32) 목우유마(木牛流馬)(33) 상통천문(上通天文) 하달지리(下達地理) 전무후무(前無後無) 제갈공명(諸葛孔明)(34) 난세간웅(亂世奸雄) 위왕(魏王) 조조(曹操)(35) 모연추초(暮烟秋草) 처량하고 사마천(司馬遷)과(36) 한퇴지(韓退之)(37)와 이태백(李太白)과(38) 두목지(杜牧之)는(39) 시부중(詩賦中)에 문장(文章)이요 월서시(越西施)와(40) 우미인과 왕소군(王昭君)과(41) 양귀비(楊貴妃)는 만고 절색일렀건만 황량고총(荒凉孤塚) 되어있고 팔백장수(八百長壽) 팽조수(彭組壽)며(42)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도(43) 차일시(此一時)며 피일시라. 안기생(安期生)(44) 적송자(赤松子)는(45) 동해상의 신선이라 일렀건만 말만 듣고 못보았네. 아서라 풍백(風伯)에(46) 붙인 몸이 아니 놀고 무엇하리.​【解 說】​이 ;라고도 한다. 불수빈이라 함은 웃지말라는 뜻으로, 젊었다 자랑말고 백발을 비웃지말라는 것이다. 종래에는 「여보아라 소년들아, 이내 말을 들어 보소. 어제 청춘 오늘 백발, 그 아니 가련한가」 라고 하던 것을 오위장(五衛將) 신재효(申在孝)가 첫머리를 고쳤다고, 남도 명창 박동진(朴東鎭) 이 말했다.중국의 역대 인물들을 일목요연하게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요순우탕(堯舜우湯)으로부터 시작하여 성현(聖賢)·군자(君子)·문장·재사(才士)·명장·충신·열사·협객·호걸·미희(美姬)·미인 들을 총망라한 멋진 노래인데, 결국 인생 무상을 그린 단가이다.​註 ​(1) 堯舜 堯는 옛 帝王 陶唐氏. 姓은 伊祈, 이름은 放勛. 帝곡의 아들. 「其仁如天 其和如如神 就之如日 望之如雲」舜은 옛 帝王 有虞氏. 姓은 姚, 이름은 重華. 帝堯의 王位를 이어받은 聖君임. 그의 부친 고수가 後妻에 반하여 小子 象만을 사랑하고 舜을 늘 죽이려고 하였으나 舜은 효성을 다하여 아들된 도리를 닦아 萬古大孝라 일러온다. 舜은 五鉉琴을 彈하여 南風詩를 읊었으니 그 노래에 이르되 「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온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厚也)吾民材兮」이라 하였음.(2) 禹湯 禹는 옛 帝王. 堯舜時代에 대규모의 治水工事에 성공하고 舜임금으로부터 임금자리를 물려받아 夏王朝의 始祖가 되었다 함. 治水說話·地德象徵說話등의 主人公임.湯은 姓은 子, 이름은 履 또는 天乙. 堯臣 契의 後孫임. 夏王 桀이 無道하므로 정벌하여 南巢로 추방하니 諸侯가 湯을 받들어 天子로 삼았고, 殷의 創業主가 되었으며, 武功을 이루었다 하여 成湯이라 일컬음.(3) 文武 文은 文王을 말함. 姓은 姬, 이름은 昌. 稷의 후손. 聖德으로 天下諸侯를 감화시켜 周나라 創業과 기초를 이루었음.武는 武王을 말함. 姓은 희, 이름은 發, 周文王의 아들. 堯臣의 稷의 후손. 殷王 紂가 포학하므로 정벌하여 牧野에서 大破하니 대는 자살하였다. 武王은 周의 創業主가 되었다.(4) 周公 이름은 旦. 周文王의 子, 武王의 弟, 成王의 叔父. 武王을 도와 죽을 멸하고 武王이 崩하였을 때 成王이 年幼하여 周公이 攝政하여 武庚 殺管叔 放蔡叔하고 制度와 禮樂을 정하여 天下를 다스렀다. 諡는 元 또는 文이라함. (5) 孔孟曾程朱子 孔은 孔子를 말함. 존칭해서 孔夫子라고 한다. 道德과 文章에 정통한 大聖人 이고 儒敎의 祖宗임 春秋때 魯國人. 이름은 丘, 字는 仲尼. 처음 魯에서 벼슬이 司寇에 이르렀으며, 그 후 사방을 周遊하다가 魯에 돌아와 詩.書.禮.樂.易.春秋의 六經을 닦았으며 弟子가 3천명이고, 그중 六藝에 능통한 자가 72명임. 周敬王 41년에 73세로 逝함. 唐에서 文宣王을 追封하고 元에서 大成至聖文宣王으로 追尊하였음.孟은 孟子를 말함. 중국 戰國時代사람. 이름은 軻, 字는 子輿. 子思의 門下에서 배웠고 뒤에 諸國을 歷遊하여 王道와 覇道의 優劣 義와 利의 善惡을 역설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門人 萬章등과 孔子의 道를 전하고 7篇을 냄.顔은 顔자, 즉 顔淵을 말함. 이름은 回, 字는 子淵. 孔子의 門人으로 德行에 탁월하여 亞聖이라 칭함.曾은 曾子를 말함. 이름은 參, 字는 子연. 孔子의 門人으로 그 德行의 宗統을 전하였고 ;을 지음.程은 程明道를 말함. 이름은 顥, 字는 伯淳, 號는 明道. 河南人. 宋 神宗 때의 大賢人으로 벼슬이 宗正寺丞에 이르렀고, ;를 지어 宇宙의 本性과 사람의 性이 꼭 같은 仁임을 주장하였음.朱는 朱子를 가리킴. 이름은 喜, 字는 元晦, 號는 晦庵. 南宋 大儒로서 그 학문은 居敬窮理를 위주로 하였고, 이외에 많은 저서가 있음.(6) 姜太公 姓은 姜, 字는 子牙, 이름은 尙. 周文王때 賢臣. 渭水 磻溪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周文王이 보고 그를 스승으로 삼고 先君 太公이 바라고 있던 人物이라 하여 太公望이라 불렀음. 그 뒤 武王을 도와서 紂를 칠 때 伯夷. 叔齊가 말을 붙들고 諫하매 좌우에서 죽이려 하므로 太公이 「義士也」라 하고 그냥 돌려보내게 하였음.(7) 黃石公 秦나라 때의 隱君子. 비椿上 (楚人以橋爲비)에서 素書를 張良에게 주어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 능히 王者의 스승의 될 것이다. 18년 후에 나를 濟北 穀城山下에서 다시 볼것이니 그때 黃石이 즉 나인 줄 알라」고 하였으므로 世稱 黃石公 이라함.(8) 司馬穰저 春秋때 齊나라 名將. 本姓은 田 大司馬가 된 때문에 司馬穰초라 하였음. 「景公時 爲將軍 한燕晋之師 申明約束 監軍莊賈 後至 斬以徇 燕晋聞之皆退」(9) 孫빈 戰國때 齊의 名將. 鬼谷先生의 제자. 魏人 涓과 의형제를 맺었다가 그 뒤 涓이 魏將이 됨을 알고 찾아가려고 先生에게 下直하니 鬼谷先生이 賓字를 빈字로 改名하라 하였다. 龐涓이 빈의 재주를 시기하여 魏王에게 참소하여 膝蓋骨을 잘라서 병신이 되었다. 빈字는 곧 骨이란 글자임.(10) 吳起 戰國때 名將. 衛國人. 曾子의 제자였으나 母喪을 당하고도 奔喪을 안하므로 曾子는 師弟의 誼를 끊었다. 魯에서 吳起를 등용하려 했으나 齊女와 결혼한 것을 렴疑하여 채용치 않았다. 그러자 그 아내를 죽이고 魯將이 되었다. 一券六篇을 지음. 世稱 孫吳兵法이라 함.(11) 汨羅水 중국 湖南省에 있는 水名. 屈原이 빠져 죽은곳.(12) 屈三閭 이름은 平, 字는 原. 楚의 王族으로 屈. 景. 蔿 3王族을 맡아보는 三閭大夫가 되었다가 小人의 참소로 추방되어 등을 짖고 5월 5일 汨羅水에 빠져 죽었음.(13) 湘江 廣西省에서 發源하여 洞庭湖를 흘러드는 강 이름.(14) 伍子胥 姓은 伍, 사설바둑이 字는 子수,이름은 員. 楚平王이 小人의 참소를 듣고 그 아버지 奢와 兄 尙을 罪없이 죽였다. 子胥는 吳로 亡命, 將師가 되어 吳兵을 거느리고 楚의 수도 언鄧에 돌아오니 이미 平王은 죽었는지라 그 墓를 파내어 시체를 매질하여 아버지와 형의 복수를 하고 吳國이 覇權을 잡게 하였다. 그 뒤 夫差가 吳王이 되면서 子胥의 諫함을 듣지 않고 촉鏤劍이란 칼을 주어 自殺케 하였다. 伍子胥는 분함을 못이기어 두 눈을 빼어 東門에다 걸고 吳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이 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과연 伍子胥가 죽은지 9년만에 吳나라는 越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15) 伯夷 叔齊 殷나라 孤竹君의 公子로서 伯夷는 兄, 叔齊는 아우였다. 孤竹君이 國統의 계승을 叔齊에게 명령했더니 叔齊는 그 형 伯夷가 繼承함이 正義이라 하고, 伯夷는 父命이니 어길 수 없다 하여 서로 사양하다가 결국 둘 다 도망하니 國人이 孤竹君의 仲子로 國統을 잇게 하였다.周武王이 商나라 紂를 칠 때 伯夷. 叔齊가 말을 붙들고 「以臣君伐은 不可하다」 하고 諫하였으나 듣지 않고 殷을 멸망시켰으므로 두 사람은 周栗을 먹는 것이 부끄럽다고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결국은 굶어 죽었는데, 이 두 사람의 忠節은 만고에 길이 빛나는 바이다.(16) 蘇秦 戰國時代의 말 잘하는 好辯客으로 鬼谷先生의 제자이다.처음 秦 惠王에게 청하였으나 등용치 않으므로 다시 楚. 燕. 齊. 韓. 魏. 趙 등 六國을 遊說한 결과, 合從하여 同盟拒秦케 하고 蘇秦은 合從의 長이 되었다.(17) 張儀 戰國時代의 辯士. 秦 惠王 때 宰相이 되어 連衡의 策으로 六國을 遊說하니 六國은 從約을 배반하고 秦을 섬겼다. 秦 惠王이 죽은 뒤에 六國이 다시 合從의 策을 쓰니 秦에서 물러나와 魏의 相이 되었다가 죽었다.(18) 閻羅王 佛家語에 「閻魔王也라 하였으니 地獄을 맡은 神인 閻羅王. 또 十王 중의 하나, 다섯째가 閻羅하고 혹은 元位가 十八王 위에 있다 함. 「昔有兄及妹 皆作地獄主 男治男事 말治女事 故曰雙王」(19) 孟當君의 鷄嗚狗吠 孟當君의 姓은 田, 이름은 文. 齊 威王 때 사람. 齊의 王族으로 宰相이 되었다. 薛을 봉하고 食客이 언제나 3천명이었다. 秦王의 초청으로 秦에 들어가니 秦王이 歸國을 不許하고, 軟禁하므로 그 從者 중에 개 짖는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있어 孤白구를 훔쳤고, 또 닭울음을 잘 내는 자가 있어 函谷關을 무사히 탈출하였다.(20) 信陵君의 竊符救趙 信陵의 이름은 無忌. 魏國公子. 秦이 趙의 首都 邯鄲를 침공할 때 趙公子 平原君勝이 魏公子 信陵君에게 간곡히 구원을 청하였다. 魏王은 秦을 두려워하여 不應하므로 義憤心에 불타는 信陵君은 王의 寵姬와 결탁하여 寢室안에 두었던 晉鄙印符를 훔치어 力士 朱亥를 데리고 晉鄙陣營에 나가서 軍兵의 교대를 정한즉, 晉노가 의심하고 듣지 않으므로, 朱亥를 시켜 晉도를 椎殺하고 信陵君은 그 軍士를 거느리고 趙를 구하였다.(21) 秦始皇 姓은 영, 이름은 政. 戰國 때의 諸侯를 倂合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始皇帝라고 자칭하였다. 阿房宮을 짖고 萬里長城을 쌓고 焚詩書 抗儒生한 無道한 임금이다.(22) 阿房宮 秦始皇이 지은 宮. 꾸부려 지었기 때문에 阿房宮이라고 부른다. 그 규모가 宏大하여 驪山陵까지 三百里 覆道라 한다. 「乃營作朝宮 渭南上林苑中 先作前殿 阿房東西 五百步 上可以坐萬人 下可以建五丈旗」(23)萬里長城 秦始皇이 쌓은 城 臨조에서 遼東까지 이름. 지금은 서쪽으로 甘肅省 安西縣 布隆古爾城으로부터 동쪽으로 直隸省 楡縣의 山海關지 이르러 있음. 「始皇 乃遺蒙恬 發兵三十萬人 北伐匈奴 收河南地 爲四十四縣 築長城 起臨조 至遼東 延무萬餘里 威振匈奴」(24) 童男童女 나이 어린 男女兒를 말함. 「方士徐市等 上書 請得與 童男女 人海 求三神山不死樂」(25) 三神山 海中에 있는 想像의 仙山. 우리나라에서는 金剛山. 智異山. 漢羅山 등에 蓬萊. 方丈. 영洲라는 別名을 붙여 三神山으로 일컬음. 「蓬萊 方丈 영洲 比三神山者 諸仙人 及不死藥 在焉而 黃金 白銀 爲宮關」(26) 砂丘平臺 直隸省 平鄕縣 동쪽에 있는 地名. 秦始皇이 죽은 곳. 「七月丙寅始皇 崩於沙丘平臺」(27) 驪山 陜西省에 있는 山 이름. 秦始皇의 墓가 있음.(28) 楚覇王 項羽를 말함. 이름은 籍. 江東人. 힘이 능히 山을 뽑을 만하였다 함. 秦을 멸한 뒤에 國名을 楚라하고 자칭 覇王이라 했음.(29) 時不利兮추不逝 때가 이롭지 않아 烏추馬가 가지 않는다는 말.(30) 우美人 項羽의 愛姬. 姓이 오 또는 이름이 오라고도 한다. 항상 項羽를 隨從하더니 羽가 垓下에서 포위당했을 때 自殺하였다. (歌曰) 「力拔山兮 氣蓋世 時不利兮 추不逝 추不逝兮 可奈何 우兮우兮 奈若何」(31) 烏江 安취성에 있는 江. 項羽가 自殺한 곳. 「項羽 至烏江 亭長 艤船待 謂項羽曰 江東이小 地方千里 赤是王也 願王 急渡」(32) 東南祭風 三國時代 諸葛亮이 赤壁大戰때에 南屛山에 올라 七星壇을 모으고 동남풍을 빌어서 曹操의 軍을 大敗시켰음.(33) 木牛流馬 諸葛亮이 北伐中原할 때 牛馬를 나무로 만들어서 車를 끌게 하고, 軍糧을 운반하였음 「亮長於巧想 損益連弩 木牛流馬 皆出其意」(34) 諸葛孔明 姓은 諸葛, 字는 孔明, 이름은 亮. 本 荊야 陽都人. 父의 이름은 珪이며 秦山郡丞으로 있다가 早卒하고, 亮은 그 뒤 叔父 玄을 쫓아 荊洲로 와서 살다가 襄陽城 밖 20리 되는 隆中에 집을 정하여 그 아우 均과 南陽에 躬耕하였다. 孔明이 살고 있던 곳에 臥龍岡이 있었으므로 自號를 臥龍先生이라 하였다.(35) 魏王曹操 姓은 曹, 幼時의 이름은 阿瞞(一名 吉利), 이름은 操, 字는 孟德. 沛國초郡人. 父 崇의 本姓은 夏侯氏 였으나 中常侍 曹崇의 養子가 되었으므로 姓을 曹로 하였다. 幼時부터遊영과 歌舞를 좋아하고 權謀와 機變이 많았다. 눈이 작고 수염이 길었다 함. 뒤에 魏王이 되었다.(36) 司馬遷 姓은 司馬, 이름은 遷, 字는 子長. 西漢 武宰때 사람. 스물에 南遊江准고 벼슬이 太史令에 이름. 李陵이 匈奴에게 항복하니 霧堤가 화내므로 遷이 陵의 평소의 忠誠과 우월한 將略을 말하고, 그 본뜻이 아님을 변명하다가 腐刑(고환을 베는 刑)에 처하게 되었음. 三百篇을 지음.(37) 韓退之 이름은 愈, 退之는 字, 號는 昌黍. 唐 鄧州人. 唐代 大文章으로 벼슬이 中書舍人에 이름. 謚는 文. 宋 元豊年間에 昌위伯을 追崇하였음.(38) 李太白 중국 唐나라 중엽의 詩人. 이름은 白, 字는 太白, 號는 靑蓮居士. 蜀나라 사람, 또는 롱西 사람이라고도 함. 天性이 豪放하고 술을 좋아하여 흥이 나면 곧 詩를 쓸 수 있는 天才 詩人으로 六朝風의 詩를 물리치고 漢.魏의 豪放함을 본떠 自由奔放한 감정을 발휘시켰음. 杜甫와 아울러 중국 최대의 詩人으로 詩仙이라함. 작품으로는 39卷이 있음.(39) 杜牧之 姓은 杜요, 이름은 牧, 字는 牧之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얼굴이 冠玉 같고 풍채가 豪邁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小杜라 일컬으며, 杜甫의 老杜와 비유하였다. 著書는 ;이 있다. 杜牧之의 풍채는 어찌나 좋았던지 「醉過陽州橘滿車」라 하여 杜牧之가 취해서 楊州의 酒肆거리를 지날 때 酒樓의 美女들이 杜牧之가 타고가는 수레에다 귤을 던져 수레안에 가득했다 한다.(40) 越西施 姓은 施. 春秋때 越나라 苧蘿山 밑 西村에서 산다 하여 西施라 함. 才色이 絶美하여 越王 句踐이 美人計로 西施를 吳王 夫差에게 보내서 吳王을 惑하게 하고, 吳가 망한뒤 西施는 范이와 같이 扁舟를 타고 五湖로 갔다 함.(41) 王昭君 姓은 王, 昭君은 字, 이름은 장. 西漢 元漢의 宮女. 呼韓邪單干가 入朝하여 漢에 請婚을 하여 閼氏(單干의 妃를 삼으려 할 때 元帝는 많은 宮女들을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畵工 毛延壽에게 肖像을 그려 을리게 하였다. 모든 宮女들은 서로 다투어 畵工에게 뇌물을 주었으나 昭君은 저의 姿色만 믿고 뇌물을 주지 않았더니 화상이 초상에 흠점을 찍어 바쳤으므로 元帝는 昭君을 單干에게 허락하였다. 그 뒤 帝가 이것을 악고 畵工을 死刑에 처하였다.(42) 彭祖 姓은 錢, 이름은 징. 陵絡氏의 第三子. 전頊의 玄孫. 母는 勝潰氏 彭城에 封하므로 일조라 함. 堯 때로부터 夏. 殷. 周를 지나니 壽가 8백이요, 49妻를 死別하고 54子를 두었음. 「老彭 卽 將子所謂祖也」(43) 東方朔 姓은 東方, 字는 曼천. 漢武帝時人. 그 시어머니가 죽고 이웃집 부인이 기르려 할 때 동쪽이 훤하게 밝았다 하여 東方을 姓으로 하였음. 3천년 만에 한번 익는 天上의 蟠桃를 세번이나 훔쳐 먹은자라함. 일찍이 武帝에게 말하기를 「朱儒飽欲死 方朔飢欲死」라 하였음.(44) 安期生 秦 낭야人. 海上에서 賣藥하다가 河上丈人에게 受學함. 당시 사람들이 모두 千歲翁이라 일컬었고, 秦始皇이 東遊하다가 청해서 3일 밤을 같이 이야기하고 金壁을 내리니 다버리고 阜鄕亭을 나갔다함. 괴通傳 「有齊人安期生 興通善 嘗干 項羽 羽不能用其策 安期生 卒不受羽封」(45) 赤松子 옛 仙人의 이름. 張良傳(46) 風伯 바람을 맞은 神. 「風伯進掃 雨師濾道」​​5. 운담풍경 . 雲淡風輕​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1) 소거(小車)에 술을 싣고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2) 십리사정(十里沙汀) 내려가니 넘노나니 황봉백접(黃峰白蝶) 쭈루루 풍덩 옥파창랑(玉波滄浪) 떠오나니 도화(挑禍)로다. 붉은 꽃 푸른 잎은 산용수세(山容水勢)를 그림하고 나는 나비 우는 새는 춘광 춘흥(春光春興)을 자랑한다.어디메로 가잤어라. 한곳을 점점(漸漸) 내려가니 언덕위에 초동(樵童)이요 석벽하(石壁下)에 어옹(漁翁)이라. 새벽별 가을 달빛 강심(江心)에 거꾸러져 수중산천(水中山川)을 그렸는데 편편(翩翩)(3) 나는 저 백구(白鷗)는 한가(閑暇)함을 자랑한다. 은린옥척(銀鱗玉尺)(4) 펄펄뛰고 쌍쌍원앙(雙雙鴛鴦)이 높이 떠 청풍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종일위지소여(縱一葦之所如)하여 능만경지망연(凌萬頃之茫然)이라(5). 살과 같이 가는 배는 양진(陽津) 포진(浦津) 배회(徘徊)로다.남해팔경(南海八景) 소상동정(瀟湘洞庭) 청풍적벽(淸風赤壁)이 이 아니냐. 풍월강산(風月江山) 구경하고 동해로 건너갈 제 아동방(我東方) 금수강산 동금강(東金剛)(6) 서구월(西九月)(7) 남지리(南智異)(8) 북향산(北香山)(9) 가야산(伽倻山)(10) 속리산(俗離山)을 편답(遍踏)하고 삼각산(三角山)을(11) 올라가니 금부용(金芙蓉) 만장봉에 서색(瑞色)은 반공(蟠空)이요 남산송백(南山松柏)은 울울창창(鬱鬱蒼蒼) 한강유수(漢江流水) 호호양양(浩浩洋洋) 춘대일월(春臺日月)(12) 태평기색(太平氣色)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로구나. 거드렁거리고 놀아 보자.​【解 說】​이 단가는 첫머리에 운담풍경(雲淡風輕)을 붙이고 다음부터는 다른 사설(辭說)을 부른다. 단가의 대부분은 중국의 풍경이나 인물 등을 나열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것은 우리 나라 풍경을 노래하였고, 중국의 지명은 약간 들어갔다. 다른 단가처럼 인생의 하무함을 한탄하는 것은 전혀 없고 오직 풍경에만 치중한 서경시(敍景詩)라고 할 수 있다.​註​(1) 雲淡風輕近午天 구름이 맑고 바람 가벼운 午天이 가까운 때 즉 봄의 화창한 날씨를 말함.(2) 訪花隨柳過前川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앞내를 지나가니, 宋나라 大性理學者 程顥(明道) 詩 「雲淡風輕近午天訪花隨柳過前川 傍人不識余心樂 將謂偸閒學少年」(3) 翩翩 가볍게 나부끼거나 훨훨나는 모양. 풍채가 風流스럽고 좋은 모양.(4) 銀鱗玉尺 비늘이 은빛처럼 번쩍번쩍하고 모양이 좋은 큰 물고기.(5) 縱一葦之所如하여 凌萬頃之茫然 一葦는 小舟. ;의 한 귀절.(6) 東金剛 동쪽에 金剛山이란 뜻.(7) 西九月 서쪽에는 九月山이라는 뜻.(8) 南智異 남쪽에 智異山이라는 뜻.(9) 北香山 북쪽에는 妙香山이라는 뜻.(10) 伽倻山 慶尙北道 星州郡과 慶尙南道 陝川郡 사이에 위치한 山. 紅流洞·海印寺·黃溪瀑布·崔孤雲의 遺跡 등 명승 고적이 많음.(11) 三角山 서울 牛耳洞에 있는 北漢山을 三角山이라고 한다.(12) 春臺日月 春景이 融和하여 臺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마음이 넓고 快暢하다는 뜻인데, 이 말을 盛世에 비유한 것. ;「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6. 홍문연가 . 鴻門宴歌​천하가 태평하면 언무숭문(偃武崇文)하려니와(1) 시절이 분요(紛擾)하면(2) 포연탄우(砲煙彈雨)(3) 만날 줄을 사람마다 아는 바라. 진(秦)나라 모진 정사(政事) 맹호독사(猛虎毒蛇) 심하더니 사슴조차(4) 잃단 말가. 초야에 묻힌 영웅 질족자(疾足者)(5) 뜻을 두고 곳곳이 일어날 제 강동(江東)의 성낸 범과(6) 패택(沛澤)에 잠긴 용이(7) 각기 기병(起兵) 힘을 모아 진나라를 멸할 적에 선입정(先入定) 관중자(關中者)면(8) 왕(王)하리라. 깊은 언약이 어젠 듯 오늘인 듯 어찌타 초패왕(楚覇王)은(9) 당시 세력 힘만 믿고 배은망의(背恩忘義)하단(10) 말가.무죄한 패공(沛公)을 아무리 살해코저 홍문(鴻門)에다(11) 설연(設宴)한들 하늘이 내신 사람 천붕우출(天崩又出)이라(12) 벗어날 길 없을소냐. 유능제강(柔能制剛)(13) 옛 말씀을 이로 보아 알리로다. 위의(威儀)를(14)살펴보니 백모(白矛) 황월(黃鉞)(15) 장창(長槍) 대검(大劍) 청도(靑刀) 금고(金鼓) 대기치(大旗幟)며 영기(令旗) 방패(防牌) 숙정패(肅靜覇)(16) 주장(朱杖)(17) 능장(稜杖)(18) 사모창(蛇矛槍)을(19) 좌우로 늘어 세우고 중군(中軍)의 수자기(帥字旗)를(20) 반공중(半空中) 높이 치켜 달고 좌상에 앉은 영웅 누구누구 앉았던고 녹포홍대(綠袍紅帶)(21) 호수염(虎鬚髥)(22) 팔척 장검(長劍) 비꼈으니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라. 당시 호걸 초패왕(楚覇王)은 제일 좌상(座上)에 앉으시고 흑포윤건(黑袍綸巾)에다(23) 옥결(玉결)을(24) 차시고 창안학발(蒼顔鶴髮)에(25) 표연히 앉았으니 가빈칠십호기계(家貧七十好奇計)의 신기묘산(神奇妙算) 자부하던 범증(范增)이가(26) 분명(分明)쿠나.홍수남대흑전립(紅袖藍帶黑戰笠)에 얼굴은 관옥(冠玉)이요(27) 풍채는 반악(潘岳)이라(28) 직결(直潔)에다가 뜻을 두고 육출기계(六出奇計)를(29) 흉중(胸中)에 품었으니 진평(陳平)이가(30) 그 아닌가. 동벽(東壁)의 황금전포(黃金戰袍) 황금(黃金) 투구 조대(조帶) 띠고 좌수(左手)에 홀(笏)을(31) 들고 우수(右手)에 칠성검(七星劍)(32) 뚜렷이 비꼈으니 의리 있고 사정(私情)없는 항백(項伯)이가(33) 이 아니냐.서편(西便)에 앉은 영재(英才) 정신이 호매(豪邁)하여 장검을 어루만져 기회를 기다리던 홍포은갑(紅袍銀甲) 저 장수는 항장(項莊)일시(34) 분명쿠나. 위엄이 늠름, 살기가 등등하니 이름이 모두 다 잔치라 할망정 어느 누가 두려워할거나. 대장부 평생사업(平生事業) 할 일을 하며 지내 보자.​【解 說】​이 ;는 진(秦)나라 말년, 초나라와 한나라 초기에 있던 사적(史蹟)을 엮은 노래이다.홍문(鴻門)은 홍구(鴻溝)를 말하는데,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홍구의 군문(軍門)에서 항우(項羽)와 패공(覇公)이 연회(宴會)를 베푼 곳이다.그 당시 중국에서는 진나라의 혹독한 정치에 시달리어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 허덕일 때 강동(江東)에서 항우가 일어나고 패택(覇澤)에서 유방(劉邦)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결의 형제를 하고 진나라를 쳐들어갈 때 관중(關中)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굳게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났다. 항우는 제 힘만 믿고 자기가 먼저 갈 줄 알았으나 유방이 먼저 들어 왔다. 항우는 분이 치밀어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당시 세력을 믿고 스스로 서초(西楚) 패왕(覇王)이 되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 패공은 한왕(漢王)을 봉하여 한중(漢中)으로 쫓아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범증이 패공(沛公)을 살려 두는 것은 후환을 기르는 것이라 하여, 아주 없애 버리려고 홍문에다 잔치를 열고 검무(劍舞)을 잘 추는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패공의 목을 베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미리 안 장자방(張字房)이 항우의 삼촌 항백(項伯)에게 은밀히 부탁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하였다.이 ;는 잔치에 모인 사람들의 몸차림을 낱낱이 엮었는데, 잔치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든든한 무장을 해서 그야말로 살벌하기 그지없다.그런데 이 잔치의 주빈인 패공의 몸차림이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 자못 아쉽다. 패공은 항백에 의하여 항장의 칼날은 피했으나 사실상 번쾌(樊쾌)의 공이 더 크다. 번쾌는 패공의 아장(牙將)으로, 패공과는 동서지간(同서之間)이다. 홍문연 잔치에 수행했는데, 분위기가 살벌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은근히 걱정하다가 협기를 일으켜 좌중(座中)으로 쑥 들어갔다.번쾌의 행동은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를 더 한층 놀라게 했다. 번쾌의 형상을 보면 머리털이 다 위로 솟고 눈매가 찢어진 것이 그야말로 무섭기 이를 데 없었다.그는 술을 청해서 잔을 주니까 뿌리치고는 술 항아리째 그대로 입에 대고 순식간에 들이켜 버렸다. 안주(按酒)를 주니까, 역시 뿌리치고 돼지 앞다리를 통째로 들고 뜯었다. 이것을 치주체견(치酒체肩)이라고 한다. 이것을 본 초패왕은 그만 위압(威壓)이 되고 말았다. 그는 옛일이 생각났다. 항우가 아직 힘이 덜 났을 무렵인 진시황 때에 만리장성 축성(築城) 공사에 나갔다. 항우도 본래 장사라 남보다 몇 곱절씩 돌을 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곳에 이르러 보니 어떤 사람이 돌을 짊어 놓았는데, 자기 것보다도 배나 되는 돌을 짊어 놓지 않았는가. 항우는 크게 놀라 곁사람에게 몰래 그를 물어 보았더니 그가 바로 번쾌였던 것이다. 항우는 그만 옛날이 생각나서 패공을 번쾌에게 빼앗겨 놓치고 말았다. ;는 이 대문을 엮지 않고 단순히 항장무(項莊舞)에 대한 것만 엮었다.​註​(1) 偃武崇文 武를 그만두고 文을 숭상한다는 뜻. 즉 無事를 끝마치고 文化를 숭상한다는 말임.(2) 紛擾 紛亂. 즉 어수선하고 떠들썩함.(3) 砲煙彈雨 자욱한 銃砲의 연기와 비오는 듯하는 탄환. 곧 銃砲의 사격이 몹시 심한 전투를 이르는 말(4) 사슴 指鹿爲馬를 이르는 말. 즉 秦나라 丞相 趙高가 秦 二世 皇帝의 권력을 농락해 보려고, 일부러 사슴을 말이라고 속이어 바친 옛일에서 나온 말. 사슴 한 마리를 바치고 皇帝에게「좋은 名馬가 있어 비치겠습니다」하니 2世가 웃으며「丞相이 그릇 알았나? 어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느냐」하고 諸臣에게 물으매 혹은 말이라 하고 혹은 사슴이라 하니, 趙高가 사슴이라고 하는 자는 暗裡에 죽이고 말이라고 한 자는 대우하였음. 그래서 웃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이르는 말. 또는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이려는 것을 이르는 말.(5) 疾足者 疾은 빠르다는 뜻. 즉 빠른 사람이라는 말.「부轍曰 秦失其鹿 高材疾足者 先得焉」(6) 江東의 성낸 범 江東은 揚子江의 東岸. 楚의 項羽가 起兵한 곳. 성낸 범이란 項羽를 말함.(7) 沛澤에 잠긴 龍 沛는 중국 江西省 徐州縣에 있는 地名. 龍은 漢高祖 劉邦을 말 함.(8) 先入定 關中者 楚懷王이 項羽와 劉邦을 나누어 보내면서「먼저 關中(奏의 서울)에 들어가는 者가 王이 되리라」고 약속한 말.(9) 楚覇王 項羽를 말함. 이름은 籍. 江東人. 힘이 능히 山을 뽑을 만하였다 함. 秦을 멸한뒤에 國名을 楚라 하고 自稱 覇王이라 함.(10) 背恩忘義 은혜를 배반하고 義를 잊는 것.(11) 鴻門 鴻門은 鴻溝를 말함. 陝西省 臨潼縣 동쪽에 있는 地名. 鴻溝의 軍門에서 項羽와 沛公이 宴會한 곳.(12) 天崩又出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수 있다는 뜻.(13) 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능히 억센 것을 制禦한다는 뜻. ;「柔能制剛 弱能制强」(14) 威儀 위엄이 있는 儀容. 엄숙한 차림새. 禮法에 맞는 몸가짐. 戒律을 달리 이르는 말.(15) 白矛 黃鉞 흰 槍과 누른 도끼를 말함. ;「王 左杖黃鉞右秉白矛 以麾」(16) 肅靜覇 肅靜 두 字를 써서 세우던 나무패. 朝鮮時代 軍令으로 死刑을 집행할 때 떠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했음.(17) 朱杖 붉은 칠을 한 몽둥이. 주릿대 따위를 말함. 신문할 때에 매질하는 몽둥이나 武器로 썼음.(18) 稜杖 대궐 문의 출입을 막기 위해 대궐 문에 서로 어긋나게 가로지르는 둥근 나무. 길이는 240㎝쯤 되고, 중간 허리의 직경은 26㎝, 양끝의 직경은 20㎝가량 됨. 밤에 巡察을 돌 때에 쓰는 기구. 길이 150㎝되는 나무의 끝에 물미를 끼우고 위에 소리 나는 쇠두겁을 씌우고 둘 혹은 셋의 비녀장을 가로 꿰고 각 비녀장의 양편으로 둥근 쇳조각을 서너 개씩 끼우고 양끝에는 두셋의 고리를 잇달아 매달았음.(19) 蛇矛槍 세모로 된 槍. ;「陳安 左手 奮七尺大刀 右手 執丈八蛇矛」(20) 帥字旗 陣中이나 營門의 뜰에 세우던 大將에게 딸린 旗. 열 두 폭으로 되었는데 , 빛은 드림을 비롯하여 모두 누르며 帥자를 검은 빛으로 썼음. 혹은 붉은 바탕에 흰 자를 쓰기도함.(21) 綠袍紅帶 푸른 戰袍와 붉은 띠.(22) 虎鬚髥 호랑이 수염. 뻗친 수염을 말함.(23) 黑袍綸巾 검은 道袍와 靑綠綬로 만든 巾.(24) 玉결 차는 玉. ;「范增欲殺沛公 數目項羽 擧所佩玉결 示之者三」(25) 蒼顔鶴髮 창백한 얼굴에 흰 머리.(26) 范增 소人. 나이 70에 好奇計하여 項羽의 謀士가 되니 項羽가 亞父라 일컬었다. 范增이 鴻門宴에서 沛公을 죽이도록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음.(27) 冠玉 잘난 남자의 얼굴을 이르는 말. 冠玉은 冠 앞쪽을 장식하는 玉.(28) 潘岳 성은 潘, 이름은 岳, 字는 安仁. 晋 때 中牟人. 文詞가 絶麗하고 얼굴이 아름다워서 洛陽을 지나면 女人들이 길을 가로막고 과일을 던졌다 한다.(29) 六出奇計 楚漢 때 陳平이 劉邦을 도와 여섯 번 奇計를 낸 옛일.(30) 陳平 漢 陽武人. 젊을 때 가난하되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얼굴이 冠玉과 같았으며, 漢高祖를 섬기어 누차 奇策을 내어서 漢의 功臣이 되어 曲逆侯를 봉하고 左丞相이 되었다.(31) 笏 옛날 君臣이 가지는 手版인데 상아 또는 나무로 만든 것으로 지금의 手帖用으로 그때 그 때의 일을 적음.(32) 칠성검 伍子胥가 차던 名劍. ;「劒中有七星 價値百金」(33) 項伯 項羽의 叔父. 鴻門宴會 때 項莊이 劒을 추어 沛公을 죽이려 할 때 項伯이 또한 劒舞를 추어 沛公을 막아 주었으므로 項莊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음.(34) 項莊 項羽의 從弟로 劒舞의 名手이다. 鴻門宴에서 沛公을 殺害코자 하였으나 項伯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項羽記「張良至軍門見樊쾌曰 今者項莊拔劒舞 其意常在沛公也」​​7. 장부가 . 丈 夫 恨​대장부 허랑(虛浪)하여 부귀 공명을 하직하고 삼척동(三尺童) 일필려(一匹驢)로 승지강산(勝地江山) 유람할 제 진시황(1) 고국지(古國趾)와 만리장성(2) 아방궁(阿房宮)과(3) 봉황대(鳳凰臺)(4) 황금대(黃金臺)며(5) 한무제(漢武帝) 천추유적(千秋遺跡) 선인장(仙人掌) 승로반(承露盤)과(6) 오수당월노채송(吳隨唐越魯蔡宋) 도읍터를 다 본 후에 강산이 기진하되 호흥(豪興)이 상존(尙存)하여 옥란간(玉欄干)에 높이 올라 인호상이자작(引壺觴而自酌)(7) 후 한단침(邯鄲枕)(8) 돋우 베고 장주호접(莊周蝴蝶)(9) 잠깐 되니 꿈이 또한 생시같이 우수(右手)를 높이 들어 소상반죽(瀟湘斑竹) 둘러 짚고 녹수청산(綠水靑山) 들어가니 산용수세(山容水勢)도 좋거니와 초목 무성 아름답다. 층층한 절벽상에 낙화로 자리하고 고금영웅 문장 열사 은일호탕(隱逸豪蕩) 절대가인(絶代佳人) 훤화(喧화)하여 앉았는데 좌상(座上)에 계신 손님 누구누구 모였던고.천하 장상 풍운영무(風雲英武) 사설바둑이 사군무양(事君無讓) 고요직설(皐陶稷契)(10) 만고충신 용방(龍방)(11) 비간(比干)(12) 제일 총명(聰明) 사광(師曠)이며(13) 용병여신(用兵如神)(14) 사마양저(司馬穰저)(15) 지절(志節) 높은 백이 숙제(伯夷叔齊)(16) 효친양지(孝親養志) 증자(曾子)(17) 맹종(孟宗)(18) 검무일수(劍舞一手) 항장(項莊)이며(19) 추풍강동(秋風江東) 장한(張翰)이며(20) 오호범주(五湖泛舟)(21) 범상공(范相公)과(22) 기주(嗜酒)하던 유영(劉伶)이며(23) 애월(愛月)하던 이태백(李太白)이(24) 첩첩이구(첩첩利口)(25) 소진(蘇秦)(26) 장의(張儀)(27) 일변(一邊)에 앉았는데 영웅 호걸 모인 곳에 일등 미색 둘러 있네 매희(妹姬)(28) 달기(달己)(29) 하희(夏姬)(30) 서시(西施)(31) 포사(褒사)(32) 당명황(唐明皇)의(33) 양귀비(楊貴妃)(34) 식부인(息夫人)(35) 채문희(蔡文姬)(36) 오강낙루(烏江落淚) 우미인(虞美人)(37) 경국경성(傾國傾城) 영웅 절색(英雄絶色)이 모인 곳에 경치 무궁 기이하다.수천장(數千丈) 걸린 폭포 의시은하낙구천(疑是銀何落九天)이요(38) 백만 길 높은 봉은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이라(39) 백로(白鷺) 백구(白鷗) 부안(鳧雁)들은 도화유수(桃花流水)에 떠서 놀고 난봉(鸞鳳) 공작(孔雀) 청학(靑鶴) 백학(白鶴) 두견(杜鵑) 앵무(鸚鵡)는 만학천봉에 왕래한다. 춘주(春酒)나 먹으리라. 백옥반(白玉盤) 경골준(鯨骨樽)에 제일 산채(山菜) 불로초(不老草)며 일등 해물(海物) 설리어(雪鯉魚)를 가득히 담아놓고 좌상에 앉은 손께 순배(巡杯)없이 권할 적에 전계어부(前溪漁夫) 애내성(애乃聲)에(40) 남가일몽(南柯一夢)(41) 흩어지니 어화 애닯도다 대장부 평생 뜻을 꿈에도 못 이루어 긴한숨 짧은 탄식 어느 때나 그쳐 볼까나.​【解 說】​이 ;이란 단가는 다른 것에 비해 조금 이채롭다.이것은 명승과 고적을 두루 돌고 또 고금(古今)의 영웅·열사·은일(隱逸)·문장·장상(將相)·충신·효자(孝子)·미색(美色)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경치 또한 아름다운 곳이어서 제일 좋은 산나물과 산해진미로 한잔 먹고 즐기다가 깨어 보니 꿈이어서 장부의 한이라고 한 것이다. 대개 단가(短歌)는 같은 말이 되풀이되어 나오는데 역시 만리장성이며, 아방궁·백이숙제·사마양저(司馬穰저)·항장(項莊)·범상공(范相公) 등등 여러번 설명한 사람이나 사물들이 반복된다. 여기 처음으로 나오는 달기(달己)·포사(褒사) 같은 여인은 얼굴은 비록 미모였으나 마음씨가 곱지 못한 요화(妖花)들이다. 이렇게 인물들을 재치 있게 나열하여 꾸며진 노래이다.​註​ (1) 秦始皇 註 (21) 참조.(2) 萬里長城 註 (23) 참조.(3) 阿房宮 註 (22) 참조.(4) 鳳凰臺 중국 湖南省에 있는 名臺. 李白 詩「鳳凰臺上鳳凰遊 鳳去臺空江自流」(5) 黃金臺 戰國時代 燕 昭王이 易水東南에 臺를 쌓아서 그 위에 千金을 두고 천하의 어진 선비들을 맞이하였으므로 이름을 黃金臺라 하였음. 後人이 또한 그곳에 築臺하여 京師八景의 하나로서 즉 金臺夕照가 되었다.(6) 仙人掌 承露盤 漢 武帝가 仙藥을 구하여 仙人掌으로 盤을 들고 甘露를 받기 위하여 銅으로 만든 그릇. 武帝紀「作相梁 銅柱 承露 仙人掌之屬」註「仙人 以手掌 擎盤 承甘露也」張衡賦「立修莖之仙掌 承雲表之淸露」(7) 引壺觴而自酌 술을 부어 주는 사람 없이 혼자 따라 마신다는 뜻. ;「引壺觴而自酌 眄庭柯而怡顔」(8) 邯鄲 地名. 列國 때 趙國의 首都. 現 直隸省임. 唐 開元 19년에 道士 呂翁이 邯鄲 邸舍中에서 소년 盧生을 만나니, 盧生이 자신의 곤궁함을 탄식하여서 道士가 주머니 속에서 베개를 내어 주며,「이것을 베면 榮貴를 뜻대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때 舍主는 누런 좁쌀로 밥을 짖고 있었는데 盧生이 그 베개를 베고 꿈을 꾸니 貴家 崔氏의 딸에게 장가 들어 高位에 올라 영화롭기 비할 데 없었다. 늙어서 고향으로 가고 싶었으나 不許하여 官職에서 죽게 되는 순간, 꿈을 깨니 밥이 덜 익었고 옹이 웃으며「人生事는 이 꿈과 같은 것이라」하였다. 이 꿈을 黃梁夢이라고도 함. 蘇軾 詩「一杯歸誦之 萬事 邯鄲枕」(9) 莊周 蝴蝶 莊周는 列國 때의 蒙古地方人. 성은 莊, 이름은 周, 字는 子休. 梁 惠王 때 漆園吏가 되었으나 벼슬하는 것이 오히려 비천하다 생각하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楚 威王은 百金, 齊 宣王은 千金 幣帛 등으로 그를 맞아 政丞을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齊物論「昔者莊周 夢爲蝴蝶 허허然蝴蝶也 俄然覺則 거거然周也 不知 周之夢 爲蝴蝶與 蝴蝶之夢 爲周與」(10) 皐陶稷契 堯代 네 사람의 賢臣.(11) 龍방 夏 桀의 臣下. 姓은 關. 걸에게 直諫하다가 被殺됨. ;「夏之賢臣 夏桀無道 爲酒池糟丘 龍방極諫 桀囚而殺之」(12) 比干 殷 紂의 諸父. 紂의 暴虐함을 諫하니 紂가 比干을 미워하여 聖人의 마음에는 七竅 가 있다는데 과연 있나 보자며 比干의 心臟을 꺼내어 죽였음.(13) 師曠 春秋 때 晋國의 樂師. 耳聽이 뛰어난 자이며, 남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능히 吉凶을 점쳤다고 함. ;「師曠之聰」(14) 用兵如神 軍兵을 통솔함에 규율이 엄숙하고 작전에 임하여 神計妙策으로 百戰百勝을 말함.(15) 司馬穰저 註 (8) 참조.(16) 伯夷 叔齊 註 (15) 참조.(17) 曾子 註 (5) 참조.(18) 孟宗 三國時代 吳의 江夏人. 性이 至孝하였음. 겨울에 老母가 竹筍을 원하여서 孟宗이 竹林에 들어가 슬피 우니 땅 속에서 죽순이 솟아나서 이 죽순을 老母에게 드렸음. ;「左臺御史孟宗有孝 母性嗜筍 及母亡 冬節 宗 入林哀泣 而筍生 得以供祭祀」(19) 項莊 註 (34) 참조.(20) 張翰 張使君이라고도 함. 이름은 翰, 字는 季鷹. 吳人. 晋 惠帝 때 사람. 齊王 경(경)이 淸才가 있음을 알고 大司馬 東曹椽을 삼았다. 翰은 秋風이 불어올 때 江東의 菰菜 蓴羹 노魚膾를 뜻깊이 생각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人生이란 자기 마음에 맞는 생활을 하고 싶지. 뜻아닌 榮名에 구구히 얽매일 필요가 없다」하니 或人이「公은 어찌 一時의 기분만 차리고 身後의 이름은 생각지 않느냐」고 물었다. 翰은「身後의 名譽는 즉시 一杯酒만 못하다」고 대답하고 벼슬을 버리고 江東으로 떠나 갔다 함. 唐詩「張翰江東去 正値秋風時」(21) 五湖 격·조·射·貴·大湖 등 다섯 湖水를 말함. 또한 太湖의 別名이기도 함.(22) 范相公 이름은 려, 字는 少伯. 楚 宛三戶人. 越王 句踐을 도와 吳를 멸하였음. 그 뒤 大名之下에는 오래 살기 어렵다 하며 세상을 피하여 배에 西施를 태워 西湖로 떠나가서 스스로 치夷子라 일컫고 父子가 致財하였다가 그 財物을 散盡하고 또 陶에 가서 號를 陶朱公이라 일컫고, 다시 巨萬金을 致財하여 大富豪가 되었다. 王이 工人에게 명하여 金으로 그 像을 새기게 하여 朝禮하였다고 함. ;「苧蘿山若耶溪傍 有東施家 西施家 西施色美 范려獻 之吳王 其後吳滅 려復取西施乘扁舟 遊西湖而不返」(23) 劉伶 字는 伯倫. 晋 沛國人. 벼슬은 建威將軍. 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 늘 술을 사랑하여 酒德頌을 짖고 언제나 下人에게 삽을 메고 따라 다니게 하고「언제 어느 곳에서 죽을는지 모르니 죽은 곳에 묻히기 위함이라」하였다. (荷삽隨之)(24) 李太白 註 (38) 참조.(25) 첩첩利口 나불나불 지껄이는 입.(26) 蘇秦 註 (16) 참조.(27) 張儀 註 (17) 참조.(28) 妹姬 桀의 妃. 一名 末喜. 有施氏의 딸로 아름다웠으나 本性이 간사하였으며, 桀이 총애하여 그의 奸言을 좇으니 결국 나라는 망하고 桀과 같이 南巢에서 죽었음.(29) 달己 殷나라 마지막 임금인 紂의 寵姬. 간사하여 酷刑을 가하여 賢臣을 학살케하고 酒池肉林을 만들게 하고 極度의 豪奢를 일삼다가 周 武王에게 討伐되었으며,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30) 夏姬 春秋 때 鄭國의 美女. 夏徵舒의 母.(31) 西施 註 (40) 참조.(32) 褒사 周 幽王의 寵姬. 평소에 잘 웃지 않아서 王은 웃기려고 갖은 애를 썼다.褒사가 비단 찢는 소리를 좋아해서 깁비단을 수없이 찢게 해 그 뜻을 맞추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戰亂이 없는데도 공연히 烽火를 들어 諸侯가 놀라 모여들게 하였을 때 비로소 크게웃었다 한다. 그 뒤 犬戎의 侵犯 때 烽火를 올려도 諸侯가 모이지 않아 王과 褒사는 마침내 잡혀 죽었다. [史記]「周幽王之寵姬 不好笑 王悅之萬方 故不笑 乃擧烽燧 以徵諸侯 諸侯至而 無寇 褒사乃大笑後 申侯 與犬戎 攻周幽王 擧烽燧而諸侯不至遂被殺」(